함께하여 발전하는 한국항로표지기술원
등대는 항로표지의 일종으로 야간에 등화로서 선박에게 목표를 제공하고 항로 또는 위험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강력한 등관을 갖춘 탑 모양의 구조물입니다.
선박이 안전한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박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안을 항해할 때나 출입항할 때에는 육상의 뚜렷한 목표 예를 들면 섬, 곶, 산봉오리 등을 이용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는 곳이나 야간에 항행할 때에는 이들 자연목표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선박의 위치 확인이 곤란합니다.
특히 대양에서 연안으로 접근하거나 항만에 이르는 좁은 접근수로 및 항내에서는 침로를 변침하거나 위험한 암초, 천소 등 자연적 위험물과 침선 및 각종 해상공작물 등의 인위적인 장해물이 있는 장소나 야간, 무중 또는 강설, 폭우 중 항행시에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항로표지란 선박의 위치를 결정하고 변침 등의 조건을 보조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시설로써 등화, 형상, 도색, 음향, 전파 등의 수단에 의하여 특색있는 기능을 부여 설치. 관리하는 것입니다. 해상 물동량 증가에 따라 오늘날 세계각국은 경쟁적으로 선박을 확충하고있으며 선형을 대형화, 고속화, 자동화하는 등 해상 교통질서와 관련하여 항로표지의 주변 여건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으므로 항해하는 선박에게 항로표지의 중요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선박이 항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안전하고 경제적인 항로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운항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등대는 항로표지의 일종으로 유인, 무인 등대가 있으며 야간에 등화로서 선박에게 목표물을 제공하고 항로 또는 위험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강력한 등광을 설비한 탑 모양의 구조물이다. 기능에 따라 연안표지(沿岸標識), 항양표지(航洋標識), 육지초인표지 등이 있습니다.
최초의 등대를 아시나요? 파로스 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습니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요인입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 된 등대의 높이가 120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등대처럼 가늘고 둥근 모습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빌딩처럼 지어졌습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져서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습니다. 그 둥근 모형 안에 거대한 화로가 장치되어 밤에는 내내 불을 피웠습니다. 땔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램프 뒤에는 거대한 반사용 거울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파로스 등대는 단순한 항해의 표시였던 것은 아니었고, 등대 내부에는 300개 이상의 방이 있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묵었고 따라서 성곽의 역할까지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등대는 높이가 상당했는데도 꼭대기까지 연결하는 계단이 없었으며 나선형으로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어 말들이 다닐 정도였고 등대 꼭대기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아랍인들이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 등대는 빛이 너무 밝아 반사경의 불빛이 55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맑게 개인 날에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거리 모습이 거울에 비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집트가 아랍인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도 상당 기간 동안 이 등대는 잘 보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850년 경 신성로마 제국과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로스 등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아주 유리했으나 로마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즉 로마군의 상황이 이 등대의 거울에 의해 낱낱이 관찰당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싸움이 이처럼 불리하자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칼리프(회교도의 왕)에게 첩자를 보내, 등대 밑에 엄청난 금은 보화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칼리프는 즉시 등대 밑을 팠습니다. 그러나 적의 계략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반사경이 깨진 상태였고 다시 원상태로 회복을 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이때부터 등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파로스 등대는 이슬람교의 사원으로 전락 해버렸습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가 번창함에 따라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고 등대는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1375년 삼각주를 휩쓴 엄청난 대지진으로 파로스 등대는 그나마의 모습마져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지진은 후유증이 커서 지진 지역을 정리하는데만도 약 1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등대의 흔적이 없어지자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서도 파로스 등대 이야기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묻혀 지내던 파로스 등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겨우 등대가 있던 곳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던 섬에 그렇게 웅장한 등대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으로 그렇게 밝은 빛을 낼 수 있었으며 또 렌즈는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등대의 건물에 방이 수백 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혹시 작은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